카테고리 없음2009. 10. 7. 11:38

1492년 10월 2일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도 자신이 신대륙을 발견했음을 알지 못했다. 아메리카 대륙을 인도로 착각하고 그곳 원주민을 인디오라 불렀던 그는 죽는 날까지 인도로 가는 무역로를 개척한 줄로만 알았다. 그렇지만 16세기 들어 유럽 열강이 아메리카 대륙의 가치를 확인하고 열광하기 시작하면서 콜럼버스의 역사적 쾌거가 인정받는다. 신대륙은 유럽인들이 갈구하던 모든 천연 자원을 품고 있는 땅이었다. 유럽의 4배에 달하는 넓은 땅에는 황금과 광물이 넘쳐났고 초원과 계곡과 산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이제 유럽 역사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이 유럽인들에게는 흥분과 번영의 계기였지만 아메리카 원주민, 즉 인디언 입장에서는 수난의 역사의 출발점이었다. 영화 <1492 콜럼버스>의 주제가 제목처럼, 신대륙 개척은 인디언의 시각에서는 바로 `낙원의 정복` 과정이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동북 아시아가 고향이다. 사냥 부족이던 그들은 빙하기인 2만~3만 년 전에 사냥터를 찾아 떠돌다가 당시 알레스카로 이어져 있던 육로를 통해 이주해 온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인디언은 곰이나 버팔로를 사냥했으며 부분적인 경작을 통해 생활을 유지했다. 서구인들이 몰려든 15세기 당시 인디언 문화는 석기 시대 수준에 머물고 있었지만, 그들은 엄연히 아메리카 대륙의 주인이었다. 게다가 전세계인들이 즐기는 감자, 토마토 등을 최초로 재배했고 칠면조를 처음으로 사육했다는 점에서는 인류에게 혜택을 준 존재이기도 하다.
신대륙의 풍경은 그랬다. 평화롭게 살아가던 산천초목과 버팔로와 인디언의 낙원이었다. 그런데 유럽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의 대상으로만 여겼다. 유럽의 모국어로 지역을 명명하고 말뚝을 박아 경계를 세운 다음 그 자리를 자신의 영토라고 선언할 뿐이었다. 인디언들은 유럽인의 눈에 참으로 성가신 미개인이었다. 유럽인들의 이기적인 시각과 막강한 화력은 인디언을 죽음으로 내몰았고 살아남은 자들은 사회의 주변으로 몰아세웠다.
인디언들의 인구 통계가 그들의 비극적 운명을 단적으로 증명해 보인다. 신대륙 발견 당시 인디언 인구에 대해서는 다양한 추정치가 있지만 어떤 자료로도 신빙성을 고집하기는 어렵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수가 질병, 기아, 전쟁 등으로 급격히 줄어든 상태에서 유럽인의 기록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문헌에 따라 그 추정치가 몇 배 편차를 보이는데, 그 중 가장 후한 통계에 따르면 아메리카 대륙 전체에는 9,000만명에 이르는 인디언이 있었고 북아메리카 인디언만도 1,000만 명이었다. 그런데 1990년 현재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숫자는 200만 명 남짓이다. 지난 500년 동안 인디언들은 자기 증식을 하지 못하고 북아메리카에서만 5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든 것이다. 그간 아메리카 대륙을 빙하기나 대지진 같은 천재지변이 휩쓸었다는 기록이 없음은 물론이다. 백인들의 신대륙 발견과 개척 과정이 인디언들에게는 천재지변만큼이나 치명적이었다는 설명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인디언들의 입장에서 서로운 또 다른 사실은 그들이 정당하게 기억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많은 서부 영화들은 아메리카 인디언을 가장 유명한 원주민 악당으로 만들었다. 우리가 기억하는 인디언들은 단란한 백인 가족들의 포장 마차를 습격해 약탈하고 포로의 살껍질을 벗겨 내거나 백인 여성을 강간하는 모습이다. 아니면 백인에게 빌붙어 사는 기생충 같은 존재이다. 서부 영화들은 인디언에게 견디기 힘든 지옥과도 같은 경험일 것이다.
16세기 이후 본격화된 유럽 국가의 신대륙 개척 과정에서 선두 주자는 단연 스페인이었다. 스페인은 중앙 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의 대부분 지역 그리고 현재 미국의 남서부 지역을 점령했다. 특히 1520년을 전후해 멕시코의 아스텍 제국을 정복함으로써 스페인 국왕의 창고는 금은보화로 가득 찼으며 이 때문에 주위 국가들의 시기와 부러움을 샀다. 포르투갈은 현재의 브라질 지역을 개척하기 시작했고 초기 프랑스인들은 오대호 근처에서 인디언들과 모피 등을 교역하면서 주로 캐나다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북아메리카 인디언의 수난사에서 주된 가해자가 된 영국은 신대륙 개척에 뒤늦게 참여하였다. 아메리카의 동부 해안 지역을 개척하던 초기의 영국 정착민들은 인디언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두 인디언 부족이 온화한 인디언으로 기록되어 있다.
인디언들은 상상도 못 했겠지만 백인들은 수도 없이 많았다. 눈에 보이는 백인은 한줌에 불과했지만 바다 건너 유럽 대륙에는 천배 만배의 백인들이 살고 있었고 그 중 많은 이들이 아메리카를 동경했다. 급속히 늘어난 백인들이 인디언들의 영토를 넘나들자 인디언들은 상당한 위협을 느낀다. 그래서 인디언은 물리력을 동원하여 자기 보호에 나섰고, 영국 이주민들도 생존을 위해 무기를 들었으며 군대를 동원했다. 그렇게 인디언과 백인의 전쟁은 시작된 것이다.
전쟁의 구체적 계기는 프락치 문제였다. 영국인의 첩자 노릇을 하던 인디언 한 사람이 살해되자 영국군은 그 보복으로 살해 가담자들을 처형하였다. 그러자 그간 쌓여 있던 감정이 폭발하면서 1675년에 전쟁이 발발한다. 킹 필립의 전쟁으로 뉴잉글랜드 지역 전체가 전화에 휩싸이게 되었다. 영국인과 인디언은 어린이와 부녀자를 가리지 않고 학살과 보복을 반복한다. 그 결과 영국인들의 정착지 12개 마을이 완파되었고 드넓은 농경지와 산업 시설이 황폐화되었다. 이때의 인디언의 피해 사황은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백인은 600명 이상이 살해되었다. 심각한 수준의 인명 피해와 경제적 피해를 낸 이 전쟁은 1676년 킹 필립이 동족에게 살해되면서 종결되었다. 백인들은 킹 필립의 가족을 포함한 인디언 부녀자와 아이들을 인질로 잡고 몇몇 인디언들에게 거래를 제안한다. 그 거래를 수용한 인디언 전사 몇몇이 킹 필립을 살해한 것이다.
18세기에 영국군은 최강의 적을 만나게 된다. 오타와 부족의 추장인 폰티악은 오타와, 오지브웨이, 포타와토미 부족을 하나로 결집한다. 폰티악은 1755년 프랑스와 연대하여 현재의 피츠버그에서 영국의 브래드독 장군 군대를 궤멸시키는 전과를 세웠다. 얼마 후 로버트 로저스가 이끄는 영국 군대와 폰티악은 잠시 동안 평화 관계를 유지한다. 폰티악은 기본적으로 영국군을 불신했지만 전쟁의 준비가 충분하지 않았고, 또한 영국군이 인디언을 공정하게 대할 것이라는 약속을 했기에 평화 조약은 체결될 수 있었다. 하지만 곧 폰티악은 백인과의 화해는 있을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영국군은 이주민들의 요구에 따라 영토 확장에 나설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신생 독립국 미국의 중심지는 아메리카 동부지역이었다. 미국은 서쪽을 향해 개발을 지속하면서 오늘날의 형태에 다다르게 된 것인데, 이 정력적인 성장 과정에서 인디언의 존재는 큰 골칫거리였다. 야만인 같은 인디언에 대한 대책은 오직 한 가지였다. 인디언을 아메리카 대륙 서쪽으로 밀어내 버리는 것이 손쉽고 확실한 해결책이었다. 그렇게 미국의 백인들은 서부를 향해 나아가면서 토지와 부를 얻었으며, 반면에 인디언들은 서쪽으로 내몰리면서 삶의 근거들을 하나씩 잃어 가게 된다.
차근차근 대륙을 잠식하던 백인들은 아메리카 서쪽 끝에서 날아온 기적 같은 소문을 듣게 된다. 1848년 캘리포니아에서 황금이 대량으로 발견된 것인데, 일확천금을 노린 사람들이 구름처럼 서쪽을 향해 몰려들었다. 백인들로서는 가슴 설레는 이 사건이 인디언들에게는 최후의 순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 경위는 이렇다. 백인들을 실은 수천 수만 대의 마차가 서부를 향해 달렸는데 그 경로에는 당연히 인디언의 영역이 포함되어 있었다. 미국 대륙을 횡단하는 철도가 놓이면서는 무시무시한 철마가 인디언 영토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미국은 대륙 횡단 철도로 노동자와 물자와 군대를 실어나르면서 한편으로는 아메리카 대륙의 서부를 본격적으로 개척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대륙 전체에 대한 장악력을 높였으며 인디언들을 무력화하는 데에도 성공한 것이다. 대륙 횡단 철도가 완성된 시점인 1869년과 북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마지막으로 저항한 순간이 엇비슷하게 일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인디언의 오늘
미국 정부는 1924년 인디언에게 시민권을 부여했다. 그리고 인디언의 참정권 박탈에 대한 위헌 판결이 1948년 애리조나에서 처음 내려진 후 인디언에게 참정권도 부여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디언에게는 시민권과 참정권이 축복일 수 없었다. 인디언에게 미국인으로서 자격을 부여하는 일련의 정책의 기저에는 인디언을 흡수, 동화시키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백인들은 자신들의 문화가 인디언의 문화보다 우월하다고 믿었고 인디언들을 미국 문화에 동화시키는 일이 당연한 것이라 여겼다. 그것은 인디언들의 저항감과 복수심을 누그러뜨리는 길이기도 했다. 그래서 인디언들은 미국의 사회 제도를 하나하나 받아들여야 했고 아이들은 백인 학교로 보내졌다. 그리고 인디언들을 기독교화하려는 움직임도 계속되었다.
현재 미국에는 약 500개의 부족이 278개의 인디언 구역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전체 인구의 3분의 1 정도만이 인더언 구역에서 농사나 목축, 고기잡이를 하면서 생활하고 있고 3분의 2 이상이 인디언 구역을 떠났다. 주로 교육이나 취업이 이주 목적인데, 그만큼 인디언 구역에서의 생활이 만족스럽지는 않은 것이다. 물론 인디언 구역을 벗어나 도시로 떠난다고 해서 상황이 그리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한때 전체 아메리카 대륙을 지배했던 인디언들이지만, 이제는 소수 민족이자 주변적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Posted by 뚜아